경기옛길

세계 문화유산 "종 묘" 둘러보기(2018.02.18)

토박이 이흥우 2018. 2. 19. 11:15

     

      설날연휴 세계 문화유산 "종 묘" 둘러보기(2018.02.18)


  종묘는 조선왕조 역대 왕과 왕후 및 추존된 왕과 왕후의 신주를 모신 조선 왕조의 사당으로 태조가 조선을

건국한 3년인 1394년 10월에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고 그해 12월에 착공하여 이듬해 1395년 9월에 완공

하였으며 태조의 4대조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 신주를 모셨다.

 현재 정전에는 19분 왕과 왕후 30분(19실 49위)의 신주가 모셔져 있으며

 영녕전에는 16분 왕과 왕후 18분(16실 34위)의 신주가 모셔져 있고

정전 뜰앞에 있는 공신당에는 정전에 계신 왕들의 83위모셔져 있다.


종묘는 사적 제125호(종로구 훈정동 1-2)로 1995년 유네스코에 "세계문화 유산"으로 등재 되었으며

   종묘 제례 및 종묘 제례악 2001년 "인류 구전 및 무형 유산 걸작"으로 등재 되어 있다.    




▼ 종묘 걷기 트랭글 트랙 정보.



▼ 종묘 걷기 트랭글 지도 정보.


▼ 종로 3가 종묘 입구 "종묘공원".



▼ 종묘 하마비.                                                              <퍼온 사진>



▼ 종묘 전교를 건너 ...



▼ 종묘 전교를 건너 우측 편의점 옆에 "삼봉 정도전 시비"가 서 있다.



▼ 종묘 공원에서 본 남산타워.



▼ 종묘의 정문인 "종묘 외대문". 



▼ 종묘 외대문 들어가기 전 좌측으로 가서 "월남 이상재 선생 동상"을 둘러 보고 ...



▼ 정도전 시비 옆 쪽의 "종로 성당". 



종묘 "외대문"으로 가운데 문은 평상시는 닫혀있고 제례시에 신께 올려지는 물건들만 드나드는 문이다.



▼ 종묘의 "신로" 가운데 길은 사람인 왕도 다닐 수 없고 오로지 신만이 다니는 길이란다. 



▼ 종묘로 들어와서 본 "외대문".



▼ 종묘 안내도. 






▼ 외대문을 통해 종묘로 들어오는 문은 안에서 볼때 좌측 문으로 들어와 오른쪽 문으로 나가야 한다.  





▼ 궁궐의 화려한 "연당"과 달리 종묘의 연못은 "지당"이라 하며 땅을 의미하는 네모난 석축을 쌓은 연못 안에 둥그런 섬은 하늘을 뜻하며 현재 종묘에는 3개의 지당 있다. 

 또한 지당 안에는 연꽃은 물론 물고기도 없으며 섬안에는 소나무 대신 신을 부를때 태우는 향불과 같이 신성하고 엄숙한 공간임을 나타내는 향나무를 심었다. 



▼ 향대청 앞 "망묘루"를 지나 "공민왕 신당"에 모인 관람객들 !. 



▼ "망묘루" (종묘의 모든 건물들은 오방색을 쓰는 대신 붉은색과 녹색만을 사용 했다). 



▼ 공민왕 신당. 



▼ "공민왕 신당"을 종묘에 모신 이유는 확실한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①태조가 모셨던 선대왕의 의미와

  ②주술적으로 억울한 공민왕과 노국공주에 대한 혼을 신으로 모셔 달래는 의미가 있는 두가지 설이 있다.  




▼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영정. 




▼ 공민왕이 그렸다는 대렵도 풍의 "준마도"가 좌측 벽에 걸려 있다. 



▼ 향대청 앞에서 ... 



▼ 모든 전통 목조 건물들은 화재를 예방하기 위해 굴뚝을 밖으로 빼고 아궁이 연료도 백탄숯을 썼다 한다.  





▼ "향대청"에는 제례시 사용하는 향로와 신주 단자, 위패. 어보 등의 제례용품을 보관을 하고 있다. 



▼ "종묘일간도"는 신실 한칸의 배치도이다. 



▼ "향대청" 내부 전시실.





▼ "향대청"의 안채 향청.



▼ "향대청"의 바깥채 집사청.



▼ "재궁"으로  가는 길.



▼ "재궁"으로 들어 가는 문.



▼ 세자가 머무는 곳.



▼ 왕이 머무는 곳.



▼ 왕이 몸을 씻는 곳.



▼ 왕이 제사를 올리기 위해 머무는 곳.



▼ 어재실 중앙 문.





▼ 어재실 중앙.



▼ 어재실 오른쪽에 왕이 십이장복을 입은 모습을 재현.





▼ 어재실 왼쪽엔 "종묘친제규도설 병풍"이 있다.



▼ 종묘대제의 의례와 제도를 알기 쉽게 그림과 글로 표현한 "종묘친제규도설 병풍".



▼ 종묘 안에서 왕이 타고 다니는 작은 가마.





▼ 종묘 곳곳을 안내해 주고 있는 외부 시민단체 소속의 "우리문화숨결의 궁궐 길라잡이" 김재영님 !.



▼ 재궁을 나와서 ... 



▼ 정전 옆 "전사청"으로 가는 길.



▼ 정전으로 들어가는 동문을 지나 ... 



▼ 전사청 앞. 



▼ 정전 19신실 안내도.



▼ 종묘대제는 매년 5월 첫번째 알요일에  국제문화 행사로 봉행 한다.



▼ 전사청 안내. 



전사청 옆에는 제사에 쓰일 물을 쓰던 우물인 제정(祭井)이 있고 앞에는 제사 음식을 검사하는

   찬막단(饌幕壇)과 날고기로 바쳐질 짐승들(소, 돼지, 양)을 검사하는 성생위(省牲位)가 있고

   정전의 노비들이 거처하는 수복방이 있다  



▼ 전사청과 우측의 제정. 



▼ 전사청의 찬막단과 수복방과 성생위. 



▼ 현재는 말라버려 물이 안 나오는 전사청의 "제정".



 제정은 향제(享祭)에 사용되는 우물을 말하는데 정전의 전사청(典祀廳) 동쪽에 있으며 현재는 지하철 개발로 물이 안나오며 외각 4면을 담장으로 둘렀고 남쪽에 출입문인 일각문(一脚門)이 있다.



전사청은 종묘제사에 사용하는 제수 음식을 준비를 하던 곳으로 ㅁ자형 건물로 주실인 정면은 7칸

   측면은 2칸이고 옆에 온돌과 마루방을 들여 행각으로 꾸몄다.



종묘의 정전은 매칸마다 신위를 모신 신실인 감실 열아홉 칸과 신실 양 옆으로 각각 두 칸의 협실이 있고 그리고 협실 양 끝에서 직각으로 앞으로 꺾여 나와 마치 신실을 좌·우에서 보위하는 듯한 동·서월랑이 다섯 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남문인 신문에서 보면 동서 109미터, 남북 69미터나 되는 묘정 월대가 넓게 펼쳐있고, 월대 가운데에는 신실로 통하는 긴 신로가 남북으로 나 있으며 뒤(월대와 건물사이)에 상월대와 기단이 설치되어있다.

그리고 내부에 모실 신위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몇 차례에 걸쳐 건물을 옆으로 증축하여 현재에 이른다.



▼ 정전.



공신당은 정전에 모셔진 19분의 왕조를 보좌했던 역대 공신들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공신당은 정전 울타리 안 월대 남쪽의 동쪽에 있으며 창건 때는 5칸에 불과하였으나 나중에 9칸으로

늘렸다가 지금은 16칸의 긴 건물로 되었다.
서쪽 반대편의 칠사당과 같은 구조 형식으로 매우 간소하게 되어 있는데 왕의 신실과 한 울타리 안에

있어서 일부러 그 형식을 낮추었다고 생각되며 16칸이라는 보기 드문 건축 형태임에도 불구하고 정전

와서도 자칫 그냥 지나치기 쉬운 건물이다.





▼ 정전의 주출입구인 "남신문"도 가운데 문 윗쪽이 살짝 열려 있게 지어졌다.



▼ 종묘 곳곳을 끝까지 세세하게 안내해 주신 "우리문화숨결의 궁궐 길라잡이" 김재영님께 감사 드립니다 !.



▼ 공신당 신주 봉안도.






▼ 영녕전으로 들어가는 문.




▼ 영녕전 16실 34신주 봉안도.



▼ 영녕전 주 출입문(가운데 닫힌문 윗부분에 틈새가 있게 제작 되어 있다).



영녕전(16실 34신주 봉안)은 신실 하나하나의 구성은 정전과 크게 다름이 없지만 부재의 크기가 정전보다 약간 작고 전체 건물 규모도 정전보다 작기 때문에 정전에서와 같은 장대함을 느끼기에는 뒤지는 감이 있으나 오히려 그 때문에 공간이 한눈에 쉽게 들어와 친근감을 더해 준다.
 네모난 아랫부분에 원형 주좌를 둔 주춧돌에 둥근 기둥과 간단한 초각을 한 익공을 짜고, 퇴칸 안에 두 짝 판문을 달고 뒤는 화방벽으로 쌓고 서까래는 부연 없는 홑처마로 꾸미는 등 세부 구성은 정전과 거의 같으며 역시 부재 표면도 단청 없이 간단히 주칠로 마감하였다.
 좌우 익실 앞으로 동·서월랑 뻗어 나와 ㄷ자 형태를 이루고 있고 박석을 덮은 상·하월대 울타리를 가득 메우는 점도 정전과 동일하다.

 이곳은 부재의 처리나 건물의 규모가 전체적으로 종묘 정전보다는 작지만 건축 공간 자체의 장엄한 공간 구성은 여기서도 잘 나타나고 있으며 질박하면서도 친근감 있는 장인들의 솜씨는 이곳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 영녕전 중앙 4실(목조, 익조, 도조, 환조).



▼ 영녕전 16실 출입문.



영녕전 동월랑 앞에서 ...



▼ 영녕전 좌월랑.



▼ 영녕전 잡상(잡상은 재앙을 막아준다는 의미로 맨 앞부터 삼장법사,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 이귀박, 이구룡, 마화상, 삼살보살, 천산갑, 나토두 순서대로 건물의 격에따라 홀수로 세운다).


《잡 상

경복궁 경회루에는 잡상이 11개나 올려져 있는데 연회장소인 경회루가 어찌 근정전(7개)보다 더 많을까 ?.

 일설에 의하면 경회루 추녀마루에는 본래 정전인 근정전보다 적은 잡상이 있었는데 중국의 황제를 대신해 온 사신들이 "황제의 사신을 가볍게 여긴다"며 항의를 하여  11개씩이나 올려놓게 되었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왕실문서 "궁궐영건의궤"에는 궁궐별로 설치된 잡상의 숫자가 나온다.
이에 따르면 창경궁에 168개 창덕궁에 148개 경희궁에 112개를 설치 했는데 숭례문 아래층에 8개(화재이후 7개로 줄여서 복원) 위층에 9개씩을 놓았고 창경궁 홍화문에 5개씩
창덕궁 돈화문에 7개씩 창덕궁 인정전에 9개씩 경복궁 동십자각에 5개씩 그리고 경회루에 11개씩과 덕수궁 중화전에 10개씩(실제로 앞면 10개, 뒷면에는 9개)을 놓았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궁궐과 건물마다 잡상의 숫자가 서로 다른 것에 대한 특별한 자료는 없지만 건물의 격과 지위에 따라 숫자가 다르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중국도 황제의 전각엔 11개씩 태자의 전각엔 9개씩 홀수로 설치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우리 창덕궁도 궁궐의 정전인 인정전의 잡상이 9개로 른 건물들의 잡상 수보다 상대적으로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실제 창덕궁은 정문인 돈화문에 추녀마루마다 7개씩 진선문과 인정문은 5개씩 그리고 정전인 인정전은

9개씩 이어서 지위가 높은 건물이 잡상 수도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경복궁은 정문인 광화문 7개씩 흥예문과 근정문 근정전 사정전도 7개씩 경성전과 흠경각은 5개씩 수정전은 6개씩이었다.

현재까지 남은 잡상들을 시대 순으로 늘어놓으면 숭례문에 9개 창경궁 홍화문에 5개 창덕궁 돈화문에 7개  수원 팔달문에 4개  창덕궁 인정전에 9개  경복궁 경회루에 11개 경복궁 동십자각에 5개 덕수궁 중화전에

10개 이다.

  이들 가운데 경회루 잡상 중 원숭이(손오공)상은 높이가 40㎝에 이르며  나머지 상들은 28 ~ 32㎝이고 
잡상은 모든 건물에 설치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궁전 건물과 궁궐과 관련이 있는 건물에만 한정된다.

 이외 남양주 수락산 흥국사와 밀양 표충사에 잡상이 있으며 남양주 회암사지에서도 잡상이 토출 되었다.


▼ 영녕전은 정전보다 규모가 약간 작을뿐 구조는 동일하다.



▼ 영녕전 16실 신위 봉안도.



▼ 영녕전 안내.



▼ 영녕전을 나와 좌측 정전과 우측 정전 악공청을 지나 외대문으로 가는 길. 



▼ 정전 악공청 안내.



정전 악공청은 종묘 제례시에 주악하는 악사들이 대기하는 건물로 정면 6칸, 측면 2칸의 맞배집으로 소박하고 간결한 건축양식을 나타내고 있다.



▼ 외대문으로 가는 길. 







▼ 종묘의  3개의 지당중 외대문 나가기전 우측의 지당



▼ 종묘의 정문인 외대문(外大門).



▼ 종묘의 정문은 외대문(外大門) 또는 외삼문(外三門)이라고도 한다.

  정문은 궁궐 정문과는 달리 구조 형태가 아주 검박하고 단순하며 가운데 닫힌 문은 제례시에만 열며 문 가운데 상부쪽이 틀어진듯 보이는것은 우리 사가의 제례시 대문을 조금 열어놓는 것과 맥을 같이하며 평상시에도 신께서 자유롭게 드나 드시라는 의미의 건축 기법이다.

  정문밖에는 하마비(下馬碑)와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56호로 지정된 어정(御井)이 있다.






※ 다음은 "우리문화숨결 궁궐길라잡이(www.palaceguide.or.kr)"에서 퍼온 글입니다 !.

궁궐과 종묘 알아보기 [종묘]

작성자
palaceguide
작성일
2017-10-10 11:35
조회
1047
종묘의 역사 jong.jpg

종묘는 조선왕조의 역대 왕과 왕비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을 봉안하고 제사를 받드는 곳이다.

 조선왕조를 건국한 태조는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고 제일 먼저 경복궁의 동쪽에 종료를 건립하고 서쪽에 사직단을 세웠다.

 이는 '좌묘우사' 즉 왕이 궁궐을 중심으로 남쪽을 향했을때 왼쪽에 종묘 오른쪽에 사직을 둔다는 유교 예법에 따른 것이다.
현재의 종묘는 정전과 영녕전을 함께 부르지만 조선시대의 종묘란 원래 정전만을 지칭하였는데 정전 건물은 1395년(태조 3년)에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 9월해 완공되었고 별묘인 영녕전은 세종 3년에 세워졌다.
정전과 영녕전은 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1608년 광해군 즉위년에 재건되었고 그 후 몇 차례 증축을 거쳐 지금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궁궐이 왕의 정치 생활공간이면 종묘는 선왕(혼)들의 공간이고 왕통의 정통성을 부여하며 사직과 더불어 국가의 근본인 왕조의 존속을 상징해왔다.

 사적 제125호인 종묘는 뛰어난 건축적 가치와 600년이 넘도록 이어져온 제례행사 등의 문화적 가치가 인정되어 1995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고 이어 2001년에는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이 인류 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외대문 daemun.jpgsinro.jpg

 

종묘의 정문은 고유의 이름이 없이 외대문이라 부른다.

궁궐의 정문과는 구조 형태가 다르며 단청은 화려하지 않게 단순하게 처리하였고 또한 중층의 웅장한 지붕이 아닌 장식과 꾸밈이 없는 맛배지붕과 가운데 두터운 판문 위에는 홍살을 설치하여 이곳이 종묘의 대문으로서 신이 사는 신성한 곳임을 나타낸다.
삼문형식에 맛배지붕 홑처마 연등천장을 하였고 원주 위에는 2익공을 구성하였으며 용마루에는 양성회칠을 하여 용두를 얹고 내림마루에 잡상을 배치했다. 

기단은 현재 단벌의 장대석이지만 조선시대에는 전면 중앙 5단의 계단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시대에 도로 조성으로 인해 계단은 땅에 묻히게 되었고 현재는 도로면이 높아져 소맷돌 끝부분만 보인다.

외대문에서 정전과 영년전의 남문으로 이어지는 신로 가운데 길은 향로 축문 폐백과 제사 예물이 오가는 신향로이기도 하다.

망묘루mang.jpg

 

망묘루라는 뜻은 "정전을 바라보며 선왕과 종묘사직을 생각한다"는 의미로 종묘의 관원이 업무를 보는 곳으로 종묘에서 유일한 팔작지붕 형태를 가진 건물로 1칸은 장주초석을 사용한 누마루이다.

 임금이 제례 때 머물면서 휴식을 취하기도 하고 도서를 보관하고 그림을 걸어두기도 했다.

 영조는 제례를 미친 후 환궁하면서 이곳에 들러 친히 시를 지어 망묘루안에 그 현판을 걸게 하였고 많은 어제시와 어제문을 써서 이곳에 남겼다.

공민왕신당
gongmin.jpg

 

공민왕은 고려 31대 왕이며 고려말기에 원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 국권회복을 위해 노력했던 개혁 군주로 알려져 있다.

이곳의 정식 이름은 고려공민왕영정 봉안지당(高麗恭愍王影幀奉安之堂)이며 건물 내부에 공민왕과 노국대장 공주가 함께 있는 영정과 그의 애마를 그린 준마도가 보관되어 있다.
 종묘에 공민왕 신당이 있는 이유는 여러 설이 있는데 개국초기에 태조가 공민왕을 기리기 위해 지었다는 설과 역성혁명에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해 지었다는 설 그리고 한국전쟁 전란 이후 지어졌다는 설이 있으나
확실한 사실은 성종 숙종 영조대의 "종묘전도"나 정조대의 "춘관통고"의 의궤에도 신당의 도면이 없으며 실록에도 신당의 설립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

못(지당) mot.jpg

 

서로 조화 되어야 그 땅이 생기가 있고 길하다는 풍수와 음양사상을 배경으로 조성된 못 가운데 둥근 섬에는 향나무를 심어 종묘가 제례의 공간임을 나타냈으며 종묘는 즐기는 공간이 아니었기에 연꽃을 심지 않았고 물고기도 기르지 않았다.
현재의 종묘에는 못이 3개 있는데 그 중 정전 남쪽에 있는 못은 세종대에 만들어진 것이며 망묘루 앞에 있는 못은 숙종대의 종묘의궤의 종묘전도에 나타나 있어 이때 또는 이전에 조성된 못이다.
외대문 옆에 있는 못은 종묘의궤와 실록에 나타나지 않고 있어 일제강점기때 조성된 거로 추정된다. 일제강점기때 작성된 종묘일지 성격의 기록물에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향대청 hyang.jpg

 

태조대(태조 13년 1413년)에 향대청 건물이 재궁보다 높다하여 이곳 남동쪽 낮은 곳으로 옮겨졌으며 향청과 집사청으로 나뉘는데 앞건물 향청은 제사 때 사용되는 향 축문 폐백과 제사 예물을 보관하는 곳이며 뒤쪽 안채 건물은 제향에 참석할 제관들이 제사 전날 마지막 재계를 이곳에서 치르며 제례준비를 하던 곳이다.
예전에는 향관청 집사청 향청 등으로 다양하게 불렸으며 현재는 신실과 제기의 전시실로 사용하고 있다.

재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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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궁은 다른 말로 재전 어숙실이라고도 불리며 3동의 건물로 북쪽은 어숙실 동쪽은 세자실이고 서쪽은 어목욕청이라 하며 각 건물을 잇는 어도가 십자형으로 설치되어있다.
임금이 제례를 행하기 하루 전날 재궁에 도착하여 다음 날 새벽 1시(축시)가 되어 제례를 올릴 때까지 머물며 마지막 날 재계를 하는 곳으로 목욕재계하고 의복을 정제하며 세자와 함께 제례를 올릴 준비를 하던 곳이다.

종묘제례 전 임금은 몸과 마음을 청결하게 하는 재계를 하는데 제의를 지내기 전에 4일 동안은 "산재"하고 그 다음 3일 동안은 "치재"를 한다. 

"산재" 기간에는 문병이나 문상은 가지 않고 살생문서를 취급하지 않으며 잠자리 음악 등 금욕생활로 지낸다.

"치재" 기간에는 정사업무는 뒤로 물리고 오로지 제사에 관한 업무만 다룬다.

전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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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청은 신주라고도 하며 종묘제례에 사용되는 제수를 만들고 제물 제기 운반구 등 여러 가지 기구들을 보관하던 곳이다. 

 주실은 부엌으로 동편에는 온돌과 마루방을 들여 행각을 꾸몄으며 동쪽에 제수를 장만 보관하는 제수칸 서쪽은 창고 남쪽은 행랑과 정문이 있으며 뜰에는 절구 같은 4개의 돌이 남아 있다.
원래 이곳에는 성생의식을 거친 희생물인 삼생(소․양․돼지)을 도살하는 공간이 따로 있었으며 제사 음식을 조리하기 위한 솥이 설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정전jong2.jpgsinsil.jpg

 

왕과 왕비의 승하 후 궁궐에서 삼년상을 치른 다음에 그 신주를 옮겨와 모시는 건물로 종묘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이며 국보(제227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전에는 태조로부터 27대 순종에 이르기까지 19실 49위 역대제왕과 그 왕비의 옮기지 않는 불천위(不遷之位) 신주를 모시고 있다.

 정전은 내부에 모실 신위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몇 차례에 걸쳐 동쪽으로 증축하여 늘렸다.
 종묘 정전의 서쪽에는 조묘 또는 별묘라 부르는 영녕전이 있는데 이곳에는 추존 4위로부터 영왕에 이르기까지 16실에 34위의 조천된 왕과 그 왕비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남문은 신문으로 혼백이 드나드는 문이며 동문은 제례 때 제관이 출입하고 서문은 악공 춤을 추는 일무원 종사원이 출입한다.

 종묘제례는 유교예법에 따라 신을 맞는 절차인 신관례 신을 즐겁게 하는 절차인 천조례 초헌례․아헌례․종헌례와 신이 베푸는 절차인 음복례. 신을 보내드리는 철변두․송신례․망료례로 구분하여 종묘제례악에 맞추어 진행된다.
왕을 비롯한 왕세자 문무백관 여러 제관을 포함한 가장 격식이 높고 큰 제사로서 밤중(약 1시부터 새벽까지)에 횃불을 키고 진중하고 엄숙하게 지낸다.
정전에서는 사계절의 각 첫 달에 정해진 날과 섣달 그믐(납일)을 합쳐 일년에 다섯 번, 영녕전에서는 봄․가을․납일 정해진 날에 3번 봉행하며 제례 이외에도 국가에 중요한 일이 있으면 빌거나 알리는 기원제나 고유제 의식을 종묘에서 먼저 행한 다음 시행한다.

공신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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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신당은 배향공신의 신위를 모신 곳으로 창건 당시는 5간에 불과하였으나 정전에서 모시는 왕의 신위가 늘어남에 따라 현재 83위를 모신 16간의 건물이 되었다. 

종묘 창건 당시 정전 담밖에 있던 공신당을 태종대(태종 10년, 1410년)에 담 안쪽으로 옮겼다.
배향공신은 임금이 운명한 후 그 임금의 신주를 종묘에 부묘할 때쯤 선정되며 임금의 신주를 종묘에 부묘할 때 동시에 배향공신의 신주도 공신당에 모셔지게 된다.
배향공신을 위한 제사는 종묘제례와 연계되어 봄․여름․가을․겨울 초에는 모두 지내며 납일에는 친향이 아니면 지내지 않는다.

생전에 모셨던 왕의 신주가 정전에서 영녕전으로 조천되면 영녕전에는 따로 공신당이 없기에 종묘에 배향되어졌던 그 공신의 신위는 공신당에 남아 있을 수 없어 가족에게 전해진다.

칠사당chil.jpg

 

칠사당은 토속신앙과 유교사상이 합쳐진 사당으로 민간신의 신적 대상이기도 하였던 7신을 위한 제사 즉 칠사를 국가의 정례인 국조오례의에 소사로 편입시켜 종묘제례와 연계하여 모신다.
칠사란 봄․여름․가을․겨울과 운행되며 인간의 운명, 궁궐이나 집의 문, 부뚜막과 음식, 성문을 관장하며 출입을 주관하는 등 실생활과 밀접한 신이다. 이 칠사에게 왕가와 궁궐의 모든 일과 만백성의 생활이 아무 탈 없이 잘 풀리도록 비는 제사이다.
정확한 건축연대는 알지 못하며 성종대 국조오례의에 표시된 것으로 보아 공신당과 비슷한 시기(태종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영녕전yeong.jpg 

세종대(세종 3년 1421년)에 정전에 모시던 태조의 4조인 목조․도조․익조․환조와 왕비의 신주를 모시기 위해 세워졌으며 조묘 혹은 별묘라고도 한다. 영녕전의 뜻은 "왕가의 조상과 자손이 함께 길이 평안하라"이다.
조천되어진 왕과 왕비의 신주를 포함하여 추존왕 8위 그리고 마지막 황태자 1위, 모두 16위의 신주와 그들의 왕비 및 황태자비의 신주 34위가 모셔져 있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광해군 원년 정전과 함께 중건, 정전은 명종대 증축한 모습 그대로 증건했지만 영녕전은 좌우익실 3간으로 기존 2간에서 1간 더 증축됐다. 이후 현종대 동서로 각 1간 증축, 헌종대에 동서로 각 2칸 증축되어 16칸이 되어 현재의 모습을 하고 있다.
정전과 차이가 있다면 태조의 4조를 모신 중앙 4간을 좌우익실 각 6간보다 높게 하여 위계를 달리 하였다. 신실의 구성과 월대의 판위․료대 그리고 남신문․동문․서문은 정전과 크게 다름이 없이 약간 작고 전체 건물 규모도 정전보다 좀 작다. 보물(제821호)로 지정되어 있다.
전사청은 언제 철거 되었는지 현재는 남아있지 않으며 옛날 전사청 터인 듯 주춧돌만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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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에는 2개의 악공청이 있으며 정전과 영녕전 서쪽 편에 있다. 종묘제례 때 음악을 담당하는 악공들이 악기를 준비하고 기다리며 연습하던 장소로써 서문을 통해 정전과 영녕전을 드나든다.
지금은 관람객의 휴식공간으로 사용되는 건물로 현재의 악공청 건물은 원래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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