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옛길

세계 문화유산 "창덕궁" 둘러보기(2018.02.18)

토박이 이흥우 2018. 2. 24. 17:31


         세계 문화유산 "창덕궁" 둘러보기(2018.02.18)




창덕궁    사적 제122호.

현재 남아 있는 궁궐은 정궁인 경복궁 , 일종의 별궁이었으나 실제로는 조선의 정궁 역할을 한 창덕궁 , 그 옆에 있던 창경궁 , 임진왜란 때 임시 궁궐의 역할을 담당하면서 광해군 때 정식 궁궐이 된 덕수궁 , 광해군 때 지어진 별궁으로 서궁으로 불리운 경희궁 , 이상의 5개를 조선의 5대궁이라 하며

궁궐의 외조는 궁궐 안에 있던 관청이 자리하는 공간이고, 치조는 신하들이 집무를 하던 공간으로 궁궐의 중심인 정전이 있는 곳이며 정전은 주위를 회랑으로 둘러 권위를 강조했고 연조는 임금의 침식과 휴식을 위한 개인생활 공간으로 임금과 왕비, 왕대비의 침전이 자리하고, 그 옆에 궁궐 안에서 필요한 제반시설과 관계자들의 생활시설과 왕세자의 거처는 주로 동쪽에 자리하여 동궁이라 했다.  

창덕궁은 조선시대 5대 궁궐 가운데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다.

1405년(태종 5)에 지어져 광해군 때부터 정궁으로 사용되었으며 화재로 몇 차례 중건과정을 거쳤고 일제강점기에 변형을 거쳤으며 창경궁과 이어져 있고 뒤쪽에는 후원이 조성되어 있다.
원래 정문인 돈화문이고 궁궐 내 금천 위에 금천교가 놓여 있다. 정전의 정문인 인정문은 양쪽의 월랑이 'ㄷ'로 감싸고 있다. 마당 안에는 임금이 걷는 길이 있고, 북쪽 끝 중앙 월대 위에는 인정전이 자리한다. 인정전의 동북쪽에는 편전인 선정전이 위치해 있다. 창덕궁의 북쪽 터에는 금원이라 부르던 후원이 있다.
창덕궁에 있는 인정전·돈화문·인정문·선정전·희정당·대조전·선원전 등은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었다.


▼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



▼ 창덕궁 돌아보기 트랭글 운동 트랙 정보. 



▼ 창덕궁 돌아보기 트랭글 운동 지도 정보. 



▼ 창덕궁 돈화문 앞에서 ... 



▼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은 1412년(태종 12)에 창건 당시 창덕궁 앞에는 종묘가 자리 잡고 있어 궁의 진입로를 궁궐의 남서쪽에 2층 누각형 목조건물로 세웠으며 궁궐 대문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이며 앞에 넓은 월대를 두어 궁궐 정문의 위엄을 갖추고 왕의 행차와 같은 의례가 있을 때 출입문으로 사용했고 신하들은 서쪽의 금호문으로 드나들었다.

원래 돈화문 2층 누각에는 종과 북을 매달아 통행금지 시간에는 종을 울리고 해제 시간에는 북을 쳤다고 함. 돈화문은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다가 광해군이 즉위한 이듬해인 1609년에 재건되었으며, 보물 제383호 지정되어 있다.    



▼ 창덕궁 관람 시간 안내. 



▼ 창덕궁 관람 요금 안내. 





▼ 돈화문의 잡상(①대당사부 ②손행자 ③저팔계 ④사화상 ⑤이귀박 ⑥이구룡 ⑦마화상 ⑧삼살보상 ⑨천산갑 ⑩나토두 ⑪이름 없슴 순로 나열 하는게 통례 임)수는 건물의 중요도에 따라 달라진다 !. 



▼ 돈화문의 단청.



▼ 창덕궁 안내도.



▼ 창덕궁의 역사와 배치도. 






진선문 (門) 금천교(錦川橋)에서 ...



 진선문 (門)은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을 지나 금천교를 건너면 나오는 중문()으로 마당 둘레에는 인정전으로 통하는 인정문(門) 후원으로 가는 정면에 숙장문(門)과 우측으로 호위청(廳) 상서원(院) 행각(行閣)이 있다.




 진선문 (門)을 들어서면 좌측에 인정문(門)과 정면에는 숙장문(門)과 우측으로 호위청(廳) 상서원(院) 행각(行閣)이 있다.



호위청(廳).



상서원(院).



숙장문(門).



▼ 창덕궁의 인정문 창덕궁의 중심 건물인 인정전의  정문이며 효종· 현종· 숙종· 영조 등 조선왕조의 여러 임금이 이곳에서 즉위식을 거행하고 왕위에 올랐다.    
 건물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 지붕으로  건물 안쪽 천장은 천장 재료가 훤히 보이는 연등천장이며 단청도 소박하다.
  



▼ 창덕궁의 인정전경복궁의 근정전 창경궁의 명정전함께 조선 궁궐의 세 정전 중 하나로 건축적으로는 규모가 근정전보다는 조금 작고 건립연대는 명정전보다 뒤떨어져 중간 위치에 있다고 하겠으나, 조선왕조 역사의 주무대가 되었던 점에서는 다른 정전과는 다른 큰 의미를 가진다. 이 건물이 역사와 함께 변화되어 왔음은 내부에 꾸며진 한말의 서양식 시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인정전 앞 넓은 마당을 조정이라 한다. 



인정전  조정. 



조정의 품계석. 






인정전의 월대. 



조정의 품계석은 양반으로 문반(문관)은 정9품까지 무반(무관)은 종3품까지 도열 되어있다. 



조정은 미끄러지지 않고 눈이 부시지 않도록 박석으로 깔아 놓았다.



 인정전 서쪽의 행랑인 향실은 구중 제사에 쓰이는 향촉을 보관하던 건물이다.



인정전(국보 제225호)은 창덕궁의 정전(正殿)으로서 왕의 즉위식과 신하들의 하례나 외국 사신의접견 등 중요한 국가적 의식을 치르던 곳이다.

앞쪽으로 의식을 치르는 마당인 조정(朝廷)이 펼쳐져 있고  뒷쪽으로는 북한산의 응봉으로 이어져 있다.    

2단의 월대 위에 웅장한 중층 궁궐전각으로 세워져 당당해 보이는데 월대의높이가 낮고 난간도 달지 않아
경복궁의 근정전에 비하면 소박하며 겉보기에는 2층이지만 실제로는 통층 건물로 화려하고 천장이 아주 높고 바닥에는 원래 흙을 구워 만든 전돌이 깔려 있었으나 지금은 마루로 되어 있으며
전등 커튼 유리 창문 등과 함께 1908년에 서양식으로 개조한 것이다.      
1405년(태종 5)에 창덕궁 창건과 함께 건립되었으나 1418년(태종 18) 박자청에 의해 다시 지어졌고,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10년(광해 2)에 재건, 1803년(순조 3)에 소실된 것을 이듬해에 복원 하였고  외행각 일원은 1991년 이후에 복원했다.                                                                 



인정전 안에는 정면에 임금님의 용상이 있고 그 뒤에는 나무로 만든 곡병과 곡병 뒤에는 일월오악도(日月五岳圖)라는 병풍이 있는데 해와 달은 왕과 왕비를 상징하며  다섯 개의 산봉우리는 우리나라의 동,서,남,북,중앙의 다섯 산을 가리키며 이는 국토를 의미한다.    
이것은 임금이 중앙에서 사방을 다스리고, 음양의 이치에 따라 정치를 펼친다는 뜻을 담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주변에는 유리창을 비롯하여 전구나 커튼 등 서양 장신구가 설치되어 있는데 이는 구한말 외국과의 수교 후 다양한 외래 문물이 들어 온 것이며 1907년 순종이 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긴 후에 인정전의 실내 바닥이 전돌에서 마루로 바뀌고 전구가 설치 됨.                                                                            



인정전에서 본 조정.



 2층 같이 보이는 인정전 



▼ 선정전으로 들어가는 선정문.







▼ 선정문.



▼ 창덕궁 선정전은 보물 제814호로 왕과 왕비가 크고 작은 행사를 벌였고 몇 동의 청기와를 덮은 유일한 건물이며 조선 초기에 창건되어 오랫동안 편전(便殿)으로 이용되다가 조선 후기에 내전의 희정당을 편전으로 사용하면서 별로 활용되지 못하였다.

 당초에는 조계청(朝啓廳)이라는 건물이었는데 1461년(세조 7)에 선정전으로 개명하였다.



▼ 선정전 내부의 용상과 일월오악도(일월오봉도).







▼ 희정당 해설도. 



▼ 근대식으로 지어진 희정당 출입문은 자동차가 진입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 희정당은 전면에서는 들여다 볼수가 없다. 



▼ 뒤채로 돌아 들어가서 본 희정당 내부의 현대풍 가구들 !.








▼ 선평문은 희정당에서 왕비가 거처하는 대조전으로 통하는네개의 문중(선평문, 요휘문, 경극문, 여춘문)

 정문(남문)으로 쉽게 볼수 없도록 6개의 돌계단 위에 설치한 문으로 화평을 세상에 펼친다는 뜻 이랍니다.



▼ 대조전 수차례에 걸쳐 소실되고 재건되어, 본건물 자체는 물론 주변의 부속건물들도 많은 변화를 거쳤으며 현재 대조전은 선정전의 동쪽, 희정당 북쪽에 위치하여 정면에 선평문을 두고 건물 동쪽에 흥복헌(興福軒), 서쪽에 융경헌(隆慶軒)이라는 익각(翼閣)을 달고 있으며, 함광문(含光門)·청향각(淸香閣) 등과 행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용마루가 없는것이 특징이다.

그 둘레에는 양심합(養心閤)·경훈각(景薰閣) 등이 있고 이들 건물 뒤로는 여러 단의 화계가 장대하게 구성되어 있다.



▼ 대조전 용상. 



▼ 대조전 왕비의 침전으로 용마루가 없다.



▼ 대조전의 잡상. 



▼ 대조전의 동편건물 흥복헌은 1910년 8월 22일 마지막 어전회의(경술국치)가 열렸던 슬픈 역사의 현장.



▼ 대조전의 서쪽건물 수라간.



▼ 대조전과 이어져 있는 내의원 경훈각. 



▼ 경훈각 측면의 매화틀(왕의 대소변기)을 꺼내는 문. 



▼ 경훈각 측면의 아궁이.



▼ 경훈각 측면의 매화틀(왕의 대소변기)을 꺼내는 문과 2개의 아궁이. 



▼ 대조전의 후원. 



▼ 대조전 뒷뜰 3단 후원. 





▼ 희정당 현관 입구 차도. 



▼ 낙선재 가는 길. 



▼ 창덕궁 후원과 창경궁으로 가는 출문이 있는 동쪽의 왕세자가 머무는 동궁 성정각. 



▼ 좌측이 청덕궁 후원으로 가는 입구이고 우측이 창경궁으로 가는 문이다. 







▼ 창덕궁 후원 입구. 



▼ 창경궁으로 가는 출입문. 



▼ 성정각은 왕세자가 하루에 3번 조강(朝講), 주강(晝講), 석강(夕講)의 서연(書筵, 冑筵)을 받았던 곳으로 언제 건립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1705년(숙종 31)에 왕세자가 이곳에 있다가 뜰에 내려와 비답(批答)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이전에 건립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왕세자의 공간이었지만 국왕이 사용하기도 하였는데 1782년(정조 6)에 동궁전인 중희당(重熙堂)이 건립되면서 이 건물은 초계 문신의 시험을 치르거나 대신을 만나는 곳으로 활용되어 희정당(熙政堂)과 함께 편전으로 쓰이기도 하였고 1895년(고종 32)에는 내의원(內醫院)을 전의사(典醫司)로 개편한 뒤 내의원에 있던 현판 의약 도구 등을 옮겨와 내의원 물품 창고로 사용하였고 보호성궁 조화어약 현판이 걸려 있다.



성정각 왕세자가 기거하는 궁으로 동쪽에는 희우루가 남쪽에는 보춘정이 있다. 



▼ 낙선재. 





낙선재는 낙선재를 포함해 석복헌(錫福軒)수강재(壽康齋)를 말하며 1847년(헌종 13)에 지어진 비교적 최근의 궁궐이다.

  헌종은 여덟 살의 어린 나이에 순종의 왕위를 이어받았고 재위 3년에 효현왕후를 맞았으나 그녀는 6년 후 세상을 떠났다.

  다음해 계비의 간택이 있었는데 헌종은 관례를 깨고 직접 간택에 참여했지만 자신이 마음을 둔 경빈 김 씨가 아닌 효정왕후가 새 왕후로 결정 되었고 효정왕후가 3년 동안 후사의 기미가 없자 헌종은 이를 핑계 삼아 경빈 김 씨를 후궁으로 맞아들였다.

낙선재는 후궁 경빈 김 씨를 위해 헌종이 직접 지은 궁궐 속의 궁궐로 원래는 창경궁 권역에 속했다.

 낙선재는 헌종의 서재와 사랑채 역할을 했고 석복헌은 경빈 김 씨의 처소로 쓰였고 수강재에는 헌종의 할머니이자 선대왕 순조의 비 순원왕후가 기거했다.

 또한 그 사이에는 6각 정자인 평원루(平遠樓, 상량정)와 숙종 때 지은 취운정(翠雲亭) 등의 전각 주변으로 후원을 계단식 정원으로 꾸몄다.


낙선재 출입문인 장락문. 



낙선재는 창덕궁창경궁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 맨 좌측에 낙선재가 크게 자리 잡고 그 우측으로 석복헌수강재가 연이어져 있으며, 이들 뒤편에는 화초·석물·꽃담 굴뚝 등으로 가꾸어진 아름다운 화계와 그 위의 꽃담 너머로는 상량정·한정당·취운정이 위치해 있다. 원래 왕의 연침공간 조성을 목적으로 낙선재가 지어지고 이듬해에 빈의 처소를 위하여 석복헌을 짓고 수강재를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궁궐 안에 사대부 주택 형식으로 지은 건물로(단청 색을 하지 않음)는 낙선재와 연경당 뿐이다



낙선재의 누마루 앞에서 ... 



뒤쪽에 보이는 육각의 정자가 상량정이며 왼쪽에 삼삼와와 승화루가 자리하고 있고 상량정, 삼삼와, 승화루, 칠분서, 취운정, 한정당은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낙선재의 계단식 후원.



낙선재 후원 굴뚝과 석연지 ...





돌 받침에 小瀛洲 소영주라 씌여 있는데, 영주는 한라산을 말하며, 방장산은 지리산을, 기달 봉래 풍악 개골산은 금강산을 말하며 이 3산을 삼신산이라 하며 영주는 신선이 산다는 선계를 뜻한다.



낙선재 온돌방 둥근 장지문을 열면 누마루가 달려있다.






 

숙장문 []은 금천교 진선문통과하여 내전으로 갈 수 있는 중문으로 성종 6년(1475) 좌찬성(左成) 서거정(正)이 지어 올린 이름을 성종이 낙점하여 그때부터 사용된 이름이며 일제강점에 헐렸다가 1996년 시작된 복원공사를 통해 재건되었다.



창덕궁 궐내각사(昌德宮 闕內各司, 사적 제122호)는 왕과 왕실을 보좌하는 궐내 관청으로 관청은 대부분 궐 바깥에 있었지만 왕을 가까이 보좌하기 위해 특별히 궁궐 안에 세운 관청들을 궐내각사라고 불렀다.

  인정전 서쪽 지역에 흐르는 금천을 경계로 궐내각사 동편에 약방(內醫院)과 옥당(弘文館)이, 서편에 규장각(奎章閣)과 봉모당(奉謨堂), 대유재(大酉齋), 소유재(小酉齋) 등이 자리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왕을 가까이에서 보좌하는 근위 관청이며 여러 부서가 밀집되어 미로와 같이 복잡하며  일제강점기 때 규장각 대유재 소유재는 단순한 도서관으로 기능이 변했다가 그나마도 소장 도서들을 경성제국대학 도서관으로 옮기면서 규장각과 봉모당 등 모든 전각들이 헐리고 도로와 잔디밭으로 조성 되었던 것을 2000∼2004년에 걸쳐 현재 상태로 복원 되었다.















창덕궁 궐내각사의 향나무.









창덕궁 서문 금호문 앞 나가는 문.



창덕궁 서문 금호문                                       <창덕궁 홈페이지에서 퍼온 사진>